약은 처방되는 순간까지만 관리된다. 병원마다 다른 의사가 낸 처방이 한 사람의 약 봉투 안에서 만나는 순간부터는, 누구의 소관도 아닌 공백이 시작된다. 10종 이상의 약을 60일 넘게 쓰는 만성질환자가 171만7000명, 그중 80.6%가 65세 이상이다1. 이 공백을 0~100점짜리 숫자로 바꾸겠다는 서울대 교원창업 회사 피매치에, 중소벤처기업부가 TIPS 일반트랙으로 2년간 최대 8억원의 검증 자금을 붙였다1.
왜 '처방 이후'였나 — 가장 비어 있던 구간에 가장 많은 사람이 있었다
처방은 기관 단위로 검토된다. 내과가 낸 처방은 내과 안에서, 정형외과가 낸 처방은 정형외과 안에서 각자 안전하다. 문제는 환자가 두 처방을 들고 집으로 돌아간 다음이다. 서로 다른 병원의 약이 한 식탁 위에 올라오는 조합은 어느 기관의 전산도 보지 않는다. 국민건강보험공단 집계로 10종 이상의 약물을 60일 넘게 사용하는 만성질환자는 171만7000명이고, 이 가운데 80.6%가 65세 이상이다1. 의료 시스템이 가장 촘촘하게 관리하는 처방 단계 바로 다음에, 가장 많은 고령 환자가 몰려 있는 공백이 있다.
이 공백이 오래 방치된 이유는 구조적이다. 처방권은 의사에게, 조제는 약사에게, 복용은 환자에게 있다. 세 주체 사이에 '복용 전체'를 책임지는 자리가 없다. 환자와 가장 가까운 방문 복지사는 약 봉투를 매일 보지만 약리 지식이 없고, 약리 지식이 있는 약사는 그 집을 방문하지 않는다. 다제약물 문제는 누구도 틀리지 않았는데 결과가 틀리는 종류의 문제다.
피매치는 이 공백에서 출발했다. 2021년 서울대학교 교원창업으로 설립됐고, 대표는 서울대 임상약리학 교수인 이형기다1. 첫 제품은 개인용 약물관리 앱 필톡이다. 사용 중인 약을 등록하면 성분 중복과 함께 쓰면 안 되는 조합을 분석해 리포트로 돌려준다1. 약물 상호작용을 따지는 기능 자체는 새롭지 않다. 다른 점은 처방 시점의 의사·약사가 아니라, 복용 중인 사람 자신이 등록하는 '복용 전체'를 입력으로 삼는다는 설계다.
그런데 개인 앱의 한계는 분명하다. 하루 열 알을 삼키는 80대 환자가 스스로 앱에 약을 등록할 가능성은 낮다. 피매치가 두 번째로 만든 것은 그래서 돌봄기관용 플랫폼 필톡 biz cares였다. 복지사나 약사가 대상자의 약물을 등록하면 리포트가 자동으로 발행되고, 기관 관리자는 고위험군 현황을 한 화면에서 본다1. 입력하는 손이 환자에서 방문 복지사로 바뀐 것이다. 타이밍도 맞아떨어졌다. 2026년 3월 지역사회 통합돌봄이 전국 229개 시군구에서 전면 시행되면서, 방문 현장에서 약물 위험을 점검할 도구가 필요해졌다1.
실증은 이미 돈이 오가는 단계다. 2025년 시범사업을 거쳐 2026년부터 여러 지자체와 국가보훈부 보훈재가복지 현장에 유료로 서비스를 공급하고 있다1. 제주형 통합돌봄 실증도 추진 중이다2. 2026년 8월에는 삼성화재-인포뱅크 밸류업 벤처투자조합 2호에서 투자를 받았다. 금액은 공개되지 않았다3. 매출 규모와 공급 기관 수 역시 공개되지 않았다. 숫자가 비어 있는 자리를 '검증된 지표'로 채우겠다는 것이, 이번 TIPS 과제에서 피매치가 두는 다음 수다.
약 봉투를 보는 두 가지 방식 — 처방 시점 점검 vs 복용 전체 점검
전통적인 약물 안전은 처방하는 쪽의 책임이었다. 의사는 자기 처방을, 약사는 자기 조제를 확인한다. 피매치가 끼어드는 지점은 그 다음, 여러 처방이 합쳐진 뒤의 '복용 전체'다. 점검하는 시점·범위·입력자·근거가 모두 달라진다1.
| 영역 | 전통 방식 · 처방 시점 점검 | 피매치 · 복용 전체 점검 |
|---|---|---|
| 점검 시점 | 처방·조제하는 순간, 기관별로 한 번 | 처방 이후, 복용 중인 약 전체를 등록해 상시 분석 |
| 점검 범위 | 해당 기관이 낸 처방 안에서의 상호작용 | 여러 기관 처방을 합친 성분 중복·금기 조합 리포트 |
| 현장 입력자 | 의사·약사, 환자 본인은 약 봉투로 기억 | 환자(필톡) 또는 복지사·약사(필톡 biz cares)가 등록, 리포트 자동 발행 |
| 고위험군 식별 | 개별 임상 판단, 기관 간 공유 없음 | 기관 관리자가 고위험군 현황을 한 화면에서 관리 · MSI 0~100점 수치화 예정 |
| 근거 검증 | 개별 사례 보고 | 건보공단 데이터로 입원·의료비 연관성 검증 계획 |
표의 오른쪽 열에서 핵심은 마지막 행이다. 리포트를 발행하는 소프트웨어는 만들 수 있는 회사가 여럿이다. 그 리포트의 점수가 실제 입원과 의료비를 얼마나 설명하는지를 국민건강보험공단 데이터로 입증하는 일은, 공공 데이터 접근과 임상약리학 역량이 동시에 필요한 작업이다1. 교원창업이라는 출신이 여기서 비용이 아니라 자산이 된다.
필톡에서 지수까지 — 세 단계로 쌓는 구조
피매치의 구조는 세 겹이다. 데이터를 모으는 개인 앱, 돈을 받는 기관 플랫폼, 그리고 두 층에서 쌓인 데이터를 하나의 숫자로 압축하는 지수. 아래 세 단계는 시간순이기도 하고, 노리는 시장의 크기 순이기도 하다.
- 개인 앱으로 데이터의 입구를 열다 필톡은 사용자가 복용 중인 약물을 등록하면 성분 중복과 금기 조합을 분석해 리포트를 만든다1. 수익보다 중요한 역할은 '복용 전체'라는 데이터 단위를 만든 것이다. 처방 전산에는 존재하지 않는 데이터다.
- 돌봄기관 플랫폼으로 유료화하다 필톡 biz cares는 입력자를 복지사·약사로 바꿨다. 대상자 약물을 등록하면 리포트가 자동 발행되고 관리자는 고위험군을 한 화면에서 본다1. 2025년 시범사업을 거쳐 2026년부터 지자체와 국가보훈부 보훈재가복지 현장에 유료 공급 중이다1. 통합돌봄의 229개 시군구 전면 시행이 이 채널의 수요를 열었다1.
- 지수로 바꿔 시장을 넓히다 TIPS 과제의 산출물은 AI 기반 약물안전지수 MSI다. 복용 약물 전체와 연령·동반질환 같은 개인 특성을 함께 분석해 위험을 0~100점으로 수치화하고, 여러 약을 함께 쓰는 고위험군을 가려낸다1. 이 지수를 건보공단 데이터로 입원·의료비와의 연관성을 검증한 뒤, 병원 처방 검토와 보험사 인수심사로 활용 범위를 넓히는 것이 회사의 계획이다1.
The Bet — 정부가 검증하는 것은 앱이 아니라 '지표'다
TIPS 일반트랙은 민간 운영사가 발굴한 기술창업기업에 정부가 연구개발 자금을 붙이는 구조다1. 8억원은 헬스케어 스타트업에게 판을 바꾸는 돈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돈의 용도다. 피매치는 이 자금으로 제품을 더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제품이 뱉어내는 점수가 실제 입원·의료비와 얼마나 연결되는지를 공공 데이터로 입증하겠다고 했다1. 정부가 2년 동안 검증하는 대상은 앱의 사용성이 아니라 지표의 예측력이다.
돌봄 현장에 리포트를 파는 소프트웨어는 지자체 예산에 묶인 사업이다. 그러나 건보공단 데이터로 입원·의료비 연관성이 검증된 0~100점 지수는 다른 물건이다. 병원은 처방 검토 기준으로, 보험사는 인수심사 변수로 쓸 수 있다1. 2026년 8월 삼성화재-인포뱅크 펀드가 들어온 것은 이 두 번째 시장을 향한 신호로 읽힌다3. 베팅의 본질은 '돌봄 SaaS'에서 '검증된 리스크 지표'로 티어를 바꾸는 것이고, 그 전환의 관문이 바로 이번 2년짜리 검증이다. 뒤집어 말하면, 검증에서 유의미한 연관성이 나오지 않으면 피매치는 229개 시군구를 상대로 리포트를 파는 B2G 회사에 머문다1. 그것도 나쁜 사업은 아니지만, 8억을 붙인 이유는 아니다.
다음 12개월에 지켜볼 지표 3개
공개된 숫자가 적은 회사다. 그래서 다음 1년은 '무엇이 공개되는가' 자체가 지표다.
- MSI 검증 결과의 공개 여부 건보공단 데이터로 입원·의료비와의 연관성을 검증한다는 계획이 숫자로 나오는지가 첫 관문이다1. 점수 구간별 입원율 차이 같은 결과가 학술지나 공식 발표로 나오면, 이 회사의 정체는 SaaS 에서 지표 사업자로 바뀐다. 나오지 않으면 TIPS 2년은 연구개발 보조금으로 끝난다.
- 유료 공급 기관 수의 확장 속도 2026년부터 여러 지자체와 국가보훈부 보훈재가복지 현장에 유료 공급 중이지만 기관 수와 매출은 공개되지 않았다1. 통합돌봄 229개 시군구 가운데 몇 곳이 유료로 전환하는지, 제주형 통합돌봄 실증이 본사업으로 이어지는지가 B2G 채널의 깊이를 보여준다12.
- 병원·보험사 채널의 첫 계약 회사가 밝힌 확장 방향은 병원 처방 검토와 보험사 인수심사다1. 삼성화재-인포뱅크 펀드 투자 이후 보험사와의 실증이나 데이터 협력이 발표되는지가 두 번째 시장의 실체를 가른다3. 지자체가 아닌 첫 민간 고객이 누구인지가 다음 라운드의 서사를 결정한다.
그 숫자가 건보공단 데이터 앞에서 버티는지가, 다음 이야기다.

